Missing you2010/05/22 03:56

 

Missing you - 123


한바탕 소란이 끝나자 앤틀의 무리들은 굳이 사양하는 이들을 앞뒤로 억지로 잡아끌며 기사단의 숙소로 끌고 갔다. 이자드도 처음에는 말리는 투였지만 은근히 그런 부하들을 나무라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중이었다. 출신과 가문등을 따지는 여느 다른 기사단과는 달리 시커와 앤틀은 어떻게 보면 닮은 꼴이었다. 첫 역사를 쓴 시커가 모태에 더 가까웠으나 가야테시아나가 토나가로 건너와 좀더  견고하고 능동적으로 다진 앤틀은 따지고 보면 사촌과도 같았다. 출신과 성분을 따지지 않고 능력과 정신을 판가름해서 가족을 받아들인다, 는 것은 여기나 저기나 거기서 거기란 뜻이다. 만일 이들이 제정신이 박힌, 아니 평범한 기사들이었다면 초면에 이국의 황위계승자에게 삽자루를 겨누지도 않았을 테고 지금처럼 낡고 허름한 유리컵에 대낮부터 술을 들이붓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자자, 마시랑께! 우리가 한 턱 내는 거여!”


“두목님도 한잔 하시죠?”


“난 사양하겠네. 적당히들 해.”


하루이틀이 아닌 듯 아침부터 알콜을 대량으로 섭취하는 그들을 보며 만류는 커녕 맞은 편에 앉아 음식까지 날라준다. 마침 아침 식사 시간인지 여러 개의 테이블에는 이름을 알아맞출 수 없는 갖가지 형태의 요리들이 날라지고 있었다. 커다란 냄비에서 끓고 있는 탕이라던가 조류와 비슷한 생김새의 통구이 등등 비록 보기에는 상당히 거북해보여도 냄새만큼은 식욕을 돋우는 향기였다.


“오신 김에 아침이라도 드십시다.”


능숙하게 칼과 나이프를 이용해 고기를 해체하는 모습의 이자드는 이들이 대장이라기 보다는 요리사에 가까웠다. 정말로 하루 이틀이 아닌 것이다. 유독 많이 먹어대는 놈들이라 식비가 많이 든다는 둥, 일주일에 몇 번씩 사냥을 나가야 된다는 둥 푸념까지 늘어놓는다. 어느새 테이블은 수십 명의 장정들로 꽉 차고 그들을 수발하는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까지 양념으로 더해져 푸근한 아침식사 풍경을 만들었다. 간간히 수저와 국저가 공중을 휘젓고 간간히 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말이다.


“내 감상을 말해줄까, 룬?”


“왠지 나랑 비슷할 거 같은데,”


“여긴 완전히.”


“아르곤 성이야.”


풋, 하며 서로 작은 웃음을 터뜨린다. 화려한 귀족가의 진수성찬보다 여기가 훨씬 낫다. 자기 몫의 음식을 건네받은 후 모두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저와 포크질이 오간다. 한명씩 와서 술이며 음료를 건네는 통에 입이 밥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시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긴 마법사나 이처럼 아리따운 아가씨는 없다는 거죠.”


이자드가 살짝 미소를 보낸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둘러봐도 여자라고는 식사수발을 도와주는 시중인들 뿐이지 기사들 중에는 여성이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가 없는 것은 이미 배경지식이 있으므로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루샨의 여인네들에 대해 들은 게 있수?”


“아니요.”


“되게 재미없다오. 뭔가 살랑대는 맛도 없고, 밍숭밍… 크아아악!”


뭔가 요상야릇한 대화가 시작되고 리안이 당황할 무렵 사태파악을 한 다른 앤틀의 젊은 기사가 황급히 그를 패대기쳤다.


“이거이거, 아저씨. 오늘 좀 과음을 하셨군요.”


“파고르으으으으! 꾸에에엑!”


청년의 손에 날아간 그는 연이어 다른 기사의 협공에 의해 갖은 비명과 함께 끌려 나갔다. 리안을 위기에서 건져낸 그는 생각보다 어렸고 또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바로 어제 만난 노년의 사내와 흡사한 외모였던 것이다.


“며칠전 여관에서 만났었죠. 파고르라고 불러주시죠.”


“아직 코흘리개지, 꼬맹이!”


“참내, 씨끄러워요!”


방해 때문인지 아니면 내용의 문제인지 얼굴이 벌게진다. 자세히 보니 역시나 어렸다. 리안보다 많아봤자 2-3세 정도의 연상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그도 역시 그을린 피부와 팔 여기저기 난 상처의 흔적이 역력했다.  얼마전 누군가에게 후려맞은 이마의 멍도 가시지 않은 채다.


“랍사의 손자라요. 아직아직 멀었당께.”


“조만간 내 검에도 사슴이 새겨질 겁니다,!”


“그래그래, 그건 네 생각….”


“좀 닥쳐요, 둘락!”


“이게 어따 대고 지랄이냐!”


퍽! 하는 소리와 파고르의 얼굴이 식탁으로 쳐박힌다. 정말 많이 보던 광경이구나. 룬은 새삼 동병상련의 정을 만끽했다. 예전에 호되게 당했던, 아니 지금도 당하고 있는 폭력적인 상하관계를 직접 목격하니 맞지도 않았건만 본인의 머리가 얼얼하다.


“룬,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얌전히 목석이 되어 음식만 씹어 삼킨다. 아즈는 룬의 행동을 금새 이해했지만 굳이 궁금해하는 리안에게 해설해주지는 않았다. 그녀가 겪은 짧은 쥬엘기간으로는 시커의 위계질서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본인도 겪고, 룬도 겪고, 하다못해 비하렌트나 테오데도 겪은 험난한 시커에서의 쥬엘시절을 말이다.


“내일 순찰에서 저도 끼어주실 거죠?”


언제 맞았냐는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며 열성적으로 바라보는 티바의 시선이 거북한 듯 이자드는 커다란 유리잔으로 얼굴을 가려본다.


“순찰?”


“네, 눈이 더 오기 전에 수색작업을 마무리 할 예정입니다.”


“분명히 말했잖아. [ 그 놈 ]은 무리라고.”


순간, 그렇게 왁자지껄하던 식당이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당황한 이쪽인간과 달리 비하렌트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


“놈은 괴물이다. 우리라도 예측할 수 없는 상대인데 너희들이 잡겠다고? 죽고 싶나?”


비이의 도발에도 이자드는 넘어가지 않고 여유 있는 태도였다. 오히려 그게 더 성질을 건드린다.


“언제 저희가 [놈]을 잡는다고 했습니까? 그저 순찰일 뿐이지요.”


“그게 그거잖아.”


왠지 껄끄러운  공기가 불편해졌다. 숟가락을 쥔 채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니 다행히 덤벼들 진 않지만 당장 손에 잡힌 걸 집어던지기 직전이었다. 울그락불그락, 분노, 침통, 우울, 전부 제각각이다.


“그럼 승률을 올려볼까?”


“!!!”


달콤하면서 새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라본 홀의 입구에는 이 장소와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가야테시아나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보면 볼 수록 짧은 커트머리가 긴 목과 잘 어울린다는 주책없는 생각마저 들게한다.


“그렇게 못 미더우면 너희들도 따라붙어.”


“가야 님.”


“명령이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테오데의 말은 사실이다. 이미 [ 반 ] 의 칭호를 버리고 세아크람 백작부인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그녀의 명을 따를 이유는 요만큼도 없는 게 맞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저벅저벅 다가오며 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까지 걸어왔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앤틀의 기사들은 벌떡 일어나며 거수경례로 그녀를 맞이한다. 마치 조직적인 군대의 움직임을 보는 것 처럼, 망설임이 없는 큰 보폭으로 한걸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두 발짝 이상씩 그녀에게 길을 터주었다. 안주인을 대한다는 태도라기 보다는 범접할 수 없는 우상을 떠받드는 행동과도 비슷해보였다. 순간  머릿속에 소박한 의문이 싹터 올랐다.


‘분명 닐리슨 세아크람은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지.’


랑피젤과의 회의와 카르나에 사절단으로 방문한 닐리슨 세아크람. 더티 블론드에 회색 눈동자. 유난히 여리여리해 보이던 사내에게 무엇을 그리 반해서 먼 타국으로 결혼을 강행했을까. 궁금했던 기억이 갑자기 스며오른다. 그리고  세아크람 백작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지. 어째서 가야테시아나가, 타국의 황녀이자 여자인 그녀가 이리도 앤틀의 위에서 군림하는 것인지도 의아한 일이었던 차다.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 화르르륵!


양 손 주변으로 붉은 화염구가 불타오른다. 온 팔뚝을 휘감고 있으면서도 신기하게 옷이나 온 몸으로 불이 번지지 않는 기이한 광경에 리안의 눈이 커지고, 아즈는 자리에서 튕겨나듯 일어났다. 우당탕 넘어지는 의자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이런 위험한 동네에서 룬을 개 패듯 팰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가 전(前) 황녀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만일 그랬다면 룬은 노련미로 대충 맞은 척만 하고 알아서 급소를 피했겠지, 저렇게 처참한 몰골로 맞진 않았을 거다. 어째서 마법도구가 귀한 이 촌구석에 파한이 흔하게 박혀 있는 것이었을까? 마법사들을 만나봐서 알지만 아즈조차도 그 대단한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스펠이라도 읊조려야 하는데 그녀는 조금의 군더더기같은 동작도 없이 불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가, 가야 전하…. 정령사…셨습니까?”


정말로 처참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아즈가 간신히 단어단어를 연결해 질문했다. 마치 온 사방을 불살라 버릴 듯한 화염이 사그러지며 그녀는 멀쩡하게 실 한오라기 태우지 않은 자태로 이자드가 건네주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봐 놓고 묻니?”


오, 신이여! 하며 땅으로 꺼지는 아즈와 달리 칼잡이 셋은 넋이 나가 있었다. 어느 역사, 어느 문헌에도 가야테시아나가 마법이나 정령을 다룬다는 정보는 요만큼도 없었다. 하다못해 어린 시절 조금이나가 살을 맞대고 자랐던 두 도련님마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다.  가야는 손짓으로 사람들을 앉혔고 앤틀이 일착으로 일사불란에게 정 90° 도 허리는 직각으로 곧추세운다.


정령사. 언뜻 마법사와도 같은 단어로 들리지만 비교해놓고 보자면 정령사는 구역으로 나뉘어 봤을 때 신관의 영역에 더 가까운 이들이다. 마법사는 마나를 응용해 그것을 구현하나 신관이나 정령사는 타 영역의 존재의 힘을 이용하는 이들이다. 재능과 노력으로 자가발전을 이루는 마법사에 비해 후자의 두 부류는 조건이 있다.


“ [ 선택받은 자 ]라고 불리우죠. 신의 사랑을 받거나 정령의 사랑을 받는 이들은 마법사와는 좀 틀려요. 저같이 마나를 주무르는 인간들은 원한다면 불의 장벽을 능력껏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기후, 상황, 조건에 상관없이. 하지만 만일 불의 정령을 다룬다 하더라도 뭔가 그것의 심기와 정령사의 교감이 흐트러지거나 쉽게 말해 어긋나 버리면 죽도 밥도 아니게 되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본인이 정령사라는 것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도 있어요. 그냥 본인은 운이 좋구나, 라고 느낄 뿐. 하지만 자각하고 그것과 교감을 쌓기 시작하면 그들은 친구를 위해 헌신합니다. 제가 작은 화염구를 만들기 위해 스펠을 읇고 마나를 조합하는 단계를 거쳐야 된다면, 가야테시아나 전하의 경우는 아까 봤다시피 획~ 하고 끝나는 일이죠. 그들은 친구가 기뻐하는 일이하면 서슴치 않으니까요. ”


“어머~ 개뿔같이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서 알긴 아는구나?”


“시커에도 드물긴 하지만 존재하니까요.”


“드물어요?”


“네, 정령사들은 싸움…이라기 보다 분쟁을 싫어하지요. 그들은 평화와 공존으로 세상 만물의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파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즈의 말에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부정의 의미가 확연했다. 그럴 수가 없어! 라던가 역시 두목은 마녀였다! 라던가 등등. 물론 그 입을 입 밖에 꺼내는 대신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내가 비록 엿 같은 정령사로 선택받아서 지금 이지랄, 이꼴이지만 나름 도움도 될 테니까 얼어 죽일 일은 없을 거야. ”


“가야님도 출정하십니까?”


“애들 뒷바라지는 거들어야지.”


쿨 하게 일어나는 가야와 달리 그들은 자못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살이가 어떤지 무척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비하렌트조차도 몰랐던 가족의 야사(夜思)가 아닌가. 어느 누구도, 하다못해 클라인 마저도 그녀의 막내여동생이 정령사, 라고 알려준 적은 없었다. 아니, 알았다면 이런 촌구석에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라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삼촌은 인재를 매우매우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니 말이다. 친조카를 마구 부려먹는데 동생들이라고 안 그럴까. 가까운 예로 브란카가 있지 않은가?


다섯 명의 초롱초롱한 눈빛의 의미를 알아들은 가야는 씩- 웃는다.


“호호호, 내 이야기~ 듣고 싶니~?”


마녀의 웃음소리가 존재했다면 반드시 이랬을 것이다.  매우 귀엽게 테이블에 턱을 괴며 달콤살벌한 미소를 야릇하게 피어올린다.


“내일 출정에 참가하면 들려주~ 지~?”


“…가야 님.”


“나쁘지 않은 조건이잖아? 이대로 돌아가면 너희는 평생 궁금해 죽을 거고 지금까지 잘 숨겨온 오라버니들이 새삼스럽게 과거를 들춰낼 성격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가장 확실한 본인 입으로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오늘 하루를 불살라 보자꾸나.”


정말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사교계의 가쉽거리조차 그들의 흥미를 유발시킨 적이 없는데 테오데마저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정말 정찰만 입니까?”


“물론.”


이렇게 해서 다섯명은 앤틀의 말대로 마녀의 꼬임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가야는 느긋하게 점심 식후에 서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며 유유히 사라졌다.


“정말 몰랐어?”


“알았으면 이랬겠냐?”


비하렌트는 아직도 넋이 돌아오지 않은 자세로 고개를 획획 저어댔다.


“이건 혈연에 관계된 게 아닐까요? 선배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혈연이라니?”


검은 눈동자가 동그래진다. 순간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룬이 테이블 위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고 동시에 남은 둘의 얼굴이 정확하게 정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누가 뭐래도 참 숨기는 것에 서툰 인간들이다. 테오데만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리안의 어깨를 두들긴다.


“차차 알게 될겁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낫죠. 이 녀석은 완전 제멋대로 폭주하는 쪽에 가까우니까.”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으며 테오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남은 기사들은 어느새인가 대부분 자취를 감춘 채 어디론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아마 가야의 말대로 내일을 준비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채 치우지 않은 눈덩이를 처리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이자드는 신경 쓰지 말고 마음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아낌없는 조언을 건네주었다. 덧붙여 이제 둘락같이 무식하게 들이대는 놈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보장까지 붙여준다. 느낌에 그의 사건은 다분히 앤틀의 조직적인 꿍수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나 테오데는 굳이 진원을 따지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는 가야테이사나의 일로 가득했다.


소박하게 마련된 빵과 스튜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점심식사가 끝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재로 우르르 몰려갔다. 네 사람의 상상의 나래는 사방 팔방 전국을 횡단중이었다.


“제일 이해할 수 없는 건 전하를 순순히 여기로 보내줬다는 것입니다.”


“그러게요. 비록 실전에 투입될 수는 없어도 굉장한 일이잖아요.”


“황가의 일에 가장 잘 아는 건 너잖아, 비이.”


“나도 몰라! 삼촌들은 커녕 어머니도 말해 준 적 없다고!”


마치 할아버지가 말해주는 모닥불 밑의 모험이야기라도 들으러 가는 태세에 느지막이 뒤따르던 리안은 다 큰 남정네들의 단결력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반대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인지 아직 이해할 수 없다. 뒷배경 알아내기에 급급한 모임에 반 어거지로 합류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니르바에게 가보려는 했으나 비이가 옆에서 떼어주지를 않으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합류해야 했다.


특유의 종이 냄새가 가득한 서재에는 가야가 준비되어 있는 차 한 모금을  넘기는 중이었다.


“어지간히 엉덩이가 간지러운가 보구나? 그렇게 궁금하니?”


보고 있던 서류철을 옆에 던지며 가야는 깊게 몸을 기댄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몸가짐은 가지런하고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다. 완벽하게 교육받은 가문의 사람으로서 말투가 험악할 지언정 그녀의 손가락 놀림 하나조차도 말이다. 옷차림은 수수하고 털털하게 걸쳤지만  뽀얗게 가꿔진 피부, 핑크빛으로 발려진 입술과 세심하게 정돈된 손톱이며 만일 드레스라도 걸쳤으면 여느 귀부인처럼 보일 외모였다. 그러나 가야의 아름다움에는 마치 뾰족한 가시가 있는 것과 같았다. 예민한 사람만이 언뜻 알아차릴까, 말까 하는 본능적인 위험이다. 


“토나가를 위해 순순히 움직여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어.”


가야의 눈빛은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비꼬는 말투에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너희는 오빠들의 개니까, 남의 집 개새끼를 억지로 끌고 오는 취미는 없고.”


“!!!”


적나라한 표현에 비하렌트가 발끈하려는 찰나 다시 한 번 그녀의 눈에서 안광이 흘러나온다.


“앉아라, 조카. 말했다시피 여기는 내 영역이야. 남의 집 똥개가 설치고 다닐 권리는 없어.”


이상하게도 가야는 이들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어제부터, 아니 처음 이 땅에 말을 들인 순간부터 그랬던 일이었으나 오로지 본국의 인간들만이 허락된 이 곳에서는 특히 그랬다.


“그냥 들려주진 않을 거야. 룰을 정하겠어. 한 사람당 질문 한 개,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내 이름을 걸고 진실을 전해주지.”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간다.


“처음은 누구로 할 거… 이런, 괜한 건 물었구나? 거기, 책벌레. 너부터 시작하자꾸나.”


지적당한 아즈가 화들짝 놀란다. 물론 그도 물어보고 싶은 게 한 두개가 아니었으나 그것을 하나로 정하려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정령사는 물론 시커에도 몇 명 볼 수 있기에  존재 자체가 완전 희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전 황위 계승자, 황제의 막내여동생의 난데없는 실체에 관련된 것이니 말이다.


“저, 저기 자각은 언제 하신 겁니까?”


“12년 전. 질문 끝, 넌 아웃.”


“에에에엑!”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여유를 부렸다.


“질문 한 개라고 했지. 다음 사람부터는 머리를 잘 쓰도록 해. 내가 어떤 대답을 들려줄 지는 너희들이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달렸어.”


그때부터 남은 사람들의 눈빛이 술렁댄다. 뭔가 상상한 것과 다르다.  과거를 들어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달리 그녀의 태도는 외교관이나 협상가, 아니 책략가쪽에 가까웠다. 마치 절대 정보를 흘리지 않겠다는 굳건한 자세를 유지하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벌써부터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한가하지 않거든. 두 번째 없으면 통과야. 다음?”


“불의 정령을 다루시면 그 능력은 어디까지이며 마법사를 비교하자면 몇 그레이드까지 비교할 수 있는지요?”


룬은 사실 황가의 사적인 일에 별 흥미는 없었으나 아즈의 호기심을 위해 질문을 양보했다. 무진장 고마워하는 아즈의 눈인사를 흘기며 나중에 크게 한턱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가야도 피식거린다.


“능력은 화염에 한정되어 있어. 불 말고는 다룰 줄 아는 게 없지. 다른 정령사들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아는 사람은 알거야. 정령들은 질투가 심해. 사이가 좋은 애들도 있지만 같은 불 끼리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전투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한 가지만 뛰어난 사람도 좋겠지만 여러 가지를 적절히 사용하는 사람이 편하니까 마법사들이 주목받는 거란다. 그레이드? 말했다시피 정령사도 못 만나본 판국에 이 땅에 마법사라도 흔하디? 그건 몰라.”


“만일 여기서 아즈랑 한 판 붙는다면?”


소박한 조카의 질문에 두 인텔리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불이 붙는다. 내심 아즈도 침이 꿀꺽 넘어간다. 말로는 비폭력을 외치지만 그도 나름 승부욕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은 철저했다. 가야도 만만히 볼 대답이 아니었는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신중하게 말한다.


“…화염만으로 한정해서 붙고, 다른 여타 조건이 없다면 내가 이겨.”


“그 정도란 말입니까?”


아즈의 실력 전부를 모르는 리안은 다른 사람들이 놀라자빠지는 이유를 몰랐지만 대충 짐작하기로서 자신의 스승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뼈저리게 실감했다. 하긴 첫 만남부터가 불의 장벽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요즘 잊고 있었는데 본인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굉장한 동네였다는 것이다.


“화염만을 따졌을 때야. 만일 저 애가 수(水)나 빙(氷) 계열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한다면 난 가망이 그다지 없어. 그래서 정령사들이 전투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쓰려고 해도 그만큼의 수를 모으는 것도 힘들겠거니와 얘네들은 상성이 다른 정령들이 인위적으로 한정되고 좁은 장소에 밀집된다면 폭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자연력을 비정상적으로 밀어 넣는 것은 세상에 허락된 일이 아니거든. 아무튼 덜떨어진 마법사들이  세상의 마나가 다들 자기 호주머니에 들어있다고 믿어서 큰일이야. 그러다 벼락 맞아 되질 텐데, 쯧쯧.”


점점 철학적으로 넘어가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 아즈와 룬 정도다. 마법사인 아즈는 두말 할 필요없지만 룬의 머릿속에 정령 = 틴트라는 공식이 대립되어 있어서 미약하게나마 이해한 정도다. 그의 애검도 자신의 손을 벗어나 타인에게 쥐어지면 검과 사용자 둘 다에게 무시무시한 파장과 거부반응을 불러온다.


“다음?”


“삼촌은…”


“넌 땡이야, 조카. 방금 써먹었잖아.”


“그것도 한 개로 친 거요!?”


논할 가치도 없다는 듯 가야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잔에 입을 갖다 댄다. 이로서 남은 질문의 개수는 두 개가 되었다. 테오와 리안만이 질문권을 가진 채 모두는 엉덩이에 종기라도 난 것처럼 꼬물거렸다. 결론적으로 아즈만 덕 본 질문들이지만 정작 재밌는, 아니 중요한 파트는 건질 건덕지도 없었다. 테오데는 심각하게 갈등해야 했다. 단순히 개인의 호기심을 채워야 할지 아니면 임무와 이어져야 할지 난감했다.


“가야 님의 현재 위치는 정확히 어딥니까?”


 전자의 욕구가 월등히 강했으나 누가 뭐래도 본인이 있어야 할 자리는 잊지 않는 그였다. 가야는 누가 보아도 이미 전 황족이라는 껍데기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혼인과 동시에 계승권을 발로 차버린 건 랑피젤의 압박이라고 여겨 왔는데 막상 그녀를 직접 만나보니 그런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두루뭉실한 질문에 가야는 이방에 들어와서야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내 이름은 가야테시아나 세아크람. 토나가를 다스리는 닐리슨 세아크람 백작의 아내이며 앤틀의 또 다른 주인이며 겨울성의 검은 사슴의 지배자. 내게서 플라테인의 이빨은 들이대지 말길 바래. 지금도, 그리고 이후로도 너희들은 내 땅에 발을 들여서는 안 돼.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해. 변명 같지만 시커를 불러들인  것은 오나스지, 내가 아니야.”


분명한 거부의사다.


“…완벽한 이방인이라는 겁니까?”


“그래, 반대로 내가 남쪽 땅을 밟은 일은 없어.”


“그럼 왜 브란카 님이 우리를 여기로 보낸 것입니까?”


“오나스 기집애에게 넘어간 거겠지. 귀는 얇아가지고, 사내답지 못하긴~”


“언제 질문은 두당 하나라며!? 테오데만 봐주는거야?”


“[나]에 대한 질문에 한해서야. 왜, 이것도 하지 말까?”


“쳇, 클라인 삼촌이 이모의 정체를 알고서도 용케 넘겨줬군.”


굳건하다고 믿었던 붉은 색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생각된 건 리안뿐이었다. 숨기려고 해도 그리운 고향이다. 그것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땅.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온다.


‘그래서였구나.’


- 어서 오렴, 아가야. 고생이 많구나?


어깨와 머리에 소복이 쌓인 눈을 맨손으로 탁탁 털어주며 일행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손을 내민 사람, 바로 가야였다. 일행들이 갖은 구박을 당할 때에도 리안에게만은 애정과 상냥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단지 어린 여자애를 돌보는 거라고 여겼는데 가야에게 있어서 리안은 동향자다.


갈 곳을 잃은 사람.


‘ 하지만 내 정체를 알 리가 없을 텐데? ’


가야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언제나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거기 아가는 물어볼 게 없니?”


“아니요, 저기….”


남겨진 카드가 없는 사람들이 안절부절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미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이어질 수 없는 관계란 것은 곧 서로간의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마, 내일의 일이 끝나면 이들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이 땅을 떠나란 경고를 받은 것이다.


“…혹시 다들 모르는 거 아닌가요?”


“ ……. ”


“그러니까 가야님이 마법, 아니 정령을 다룬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비이도 몰랐잖아? 들어보니까 굉장히 강하시다면 가족 분들이 걱정하거나 우리를 여기도 보낼 이유도 없을 것 같아서. 충분히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으시니까.”


< 짝짝짝! >


“훌륭해~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180° 태도가 돌변해 갖은 애교와 아양을 떨어대는 가야를 보는 나머지 사람들의 속은 매우매우 미슥거렸다. 그걸 알면서도 찐한 애정표현은 조금도 식지 않는다. 두 손을 꼭 마주잡은 채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이다.


“잠깐! 그럼 얘 말이 사실이야?”


날아오는 펜이 머리에 꽂히는 것을 간신히 피한 비하렌트는 숨을 골랐다. 설마 그 자세에서 어떻게 단검 던지듯 만년필을 정확하게 날릴 수 있는지 가히 놀라운 실력이다.


“말이 짧다, 조카~? 어디서 굴러먹은 버릇을 여기까지 들이대니?”


“대답이나 해줘요!”


다 큰 남자가 악을 써대는 꼴은 그다지 좋은 볼거리는 못된다. 가야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단한 것을 베푸는 것 마냥 말한다.


“그래, 내가 정령사라는 것은 아무도 몰라.”


“ ! ”


“알았다면 클라인이 날 여기로 풀어줄 리 없었을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히 털어놓으면 좋으련만 가야는 말을 아꼈다.


“빌어먹을 오라버니는 너희들 상상 이상으로 무섭단다. 난 그에게 붙들릴 수 없어. 그렇게 인생을 마감한 건 디노로 충분해.”


“디노…. 디노페이 전하 말씀입니까?”


“살아있는 핏덩어리 말고 내 동생. 녀석은 누구보다도 클라인을 사랑했고 그렇게 아깝게 가버렸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거야. 내 힘을 드러내고 자랑질이라도 좀 했으면 어땠을까?”


“그거야…."


저마다의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그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시커를 떠나서 황궁의 인간들은 우두머리를 비롯해 수족들도 만만치 않은 집단이다. 랑피젤들도 지들 끼리는 서열다툼이 좀 있긴 하지만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일치단결하는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그리고 그걸 그렇게 키운 것은 다름 아닌 한명이다.


“일생을 건 계약이었지.”


“계약이라니요?”


“결혼해서 튀는 거.”


“푸헙!”


누군가의 입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관심이 없는 가야는 독백과 같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표적인 예로 네 모친인 엘르 언니도 있지만 잔머리가 약했어. 결국 원점이라는 것을 몸소 시범을 보여줬기 때문에 난 같은 실수는 저지르지 않기로 했지. 그래서 고른 게 이렇게 된 거야. 자, 얘기는 여기서 끝! 오늘은 너무 서비스가 길었네.”


지대가 높아서 낮을 해는 무척 짧은 탓에 어느 덧 해가 기울어져 노을이 방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었다. 뭔가 더 얻어내려는 그들을 매섭께 쏘아보며 가야는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는다.


“얼른 꺼져라~?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친절한 협박에 다섯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소파에 앉은 가야가 리안의 팔목을 잡는다.


“넌 좀 남아있으렴.”


“네?”


“여자끼리 할 말이 있어서 그런단다. 나머지 떨거지들은 얼른 가버려. 자고로 애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법이야.”


발악하는 덩치를 테오데와 룬이 사이좋게 양 팔을 붙든다. 반항하려는 비이를 가볍게 압박하며 테오데는 귓가에 소근거렸다.


 ‘ 나중에 리안의 입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어. 얌전히 가자. ’


물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가야가 아니었지만 가볍게 코웃음을 칠 뿐이다. 사내들이 사라지고 엉겁결에 둘이 남은 상황에 리안은 약간 긴장했다.


“무서워 할 거 없어.”


“무섭다기 보다….”


말꼬리가 흐려진다. 반대로 가야는 한결 편해진 모습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그녀는 모조리 가면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차원이라….”


“네, 네!?”


급소를 찌르는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가야는 태연할 뿐이다.


“대충 보아하니 너랑  저 놈이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봐?”


화아아악.


피가 얼굴로 몰린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여도 가야는 추궁하지 않았다. 하긴 모를 리가 없다. 비하렌트가 그렇게 리안을 싸고 도는 태도는 여동생으로서가 아니라는 것을 보는 이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꼴이니 말이다.  똑바로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으려니 가야는 한숨을 푹푹 내쉰다.


“이제는 남의 집 일이고 널 나무라는 게 아니니 얼굴 들려무나.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어디 되는 게 있니?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데 너한테 뭐라고 할 일도 아니고, 보아하니 저놈이 죽자살자인 건 확실하게 보이지, 너도 그렇게 싫지 많은 않은 것 같아서 찔러본 건데….”


한참 시간이 지나 자기 앞의 차는 차갑게 식어있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찻잔에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이것도 가야가 말한 힘의 일부인 거 같다.


“하지만 넌 [다른] 사람인데, 클라인이 허락하지 않을 거다. ”


“ ……. ”


목이 따가웠다. 아직 뭣도 시작도 안했는데 거부를 당한다는 기분은 실로 오랜만에 다가왔다. 그래, 잊고 있었다. 진정한 [이방인]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떨구어진 얼굴 아래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알고… 계신 건가요?”


“그래, 직접적으로는 알아차릴 순 없지만 난 다른 세상, 정확하게 표현해서 다른 [차원]의 사람을 또 알고 있어.”


“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거린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 있을 거라는 상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간곡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가야는 고개를 젓는다. 대신 살며시 다가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가녀린 두 손을 꼭 쥐어준다. 다른 손으로는 뺨을 토닥여주며 얼굴로 흘러내린 잔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해준다.


“황궁을 조심해. 내가 해 줄 말은 이정도 밖에 없어. 미안해, 나도 널 돕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


“…나를 지켜주는 건 강하면서도 아름답지만 배신은 용납하지 않지. 왜 하필 이런 성질머리 더러운 년에게 걸렸을까, 하고 많은 애들 중에서. 아, 물론 진심은 아니니까 가만 있어!”


누구를 윽박지르는 가 싶더니 확- 하는 열기와 함께 벽난로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가딱했다가는 서재의 책들이 모조리 잿더미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야의 고함소리에 기분이 상했다는 듯 가끔 불티를 팍팍 쏘아주는 탓에 융단의 끄트머리가 그을렸다.


“정령의 사랑을 받는다고? 그래, 어느 면에서 보면 굉장하지.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있어. 힘을 빌려주고 날 지켜주지. 그러나 그들도 감정이 있고 그건 인간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진 않아.”


“저…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셨어요?”


“말했잖니. [동류] 을 알고 있단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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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쥬빌란